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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 있는 말의 색과 한국어

세에임 2011. 5. 24. 20:38

우선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자.


1. 동무

2. 친구

3. 남친, 여친

1번 동무라는 말은 필자가 어렸을 때인 1970년~1980년 사이에 자주 쓰던 말이다. 
이 말은 친구보다 더 친한 친구, 또는 가장 친한 친구, 고향 친구를 일컽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왜 일까? 언어적 기피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 가장 재미있었던 TV 프로는 <전우>와 <배달의 기수>였다. 

여기서 북한군이 다른 사람을 부를 때 호칭이 바로 '동무'였다. 
결국 이 말은 북한이라는 금기적 소재를 만나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통해 거의 생명력을 잃고, 
2000년대는 아예 사망 수준의 단어가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의 남친과 여친이라는 말이 최근 5년 이내에 생겨났다. 

이것처럼 말의 누앙스와 색깔이 완전히 바뀐 것은 그 시대에 맞게끔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어 문법에서 볼 때 남친이라는 말과 여친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르고, 고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뭐가 바르고, 뭐가 고운 지 모르겠지만, 한국어 문법이라는 시덥잖은 괴물은 국어의 생명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최근 2년 이내에 생성된 단어 중 "엄친아", 그리고 사투리로만 사용되었던 "기럭지"라는 말은 사회적인 
현상과 의미를 가지므로 필자가 볼 때는 굉장히 좋고, 고운 말이다. 
하지만 한국어문법이라는 보안법 앞에서는 빨갱이 수준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한국어가 채택하고 있는 규범주의 문법의 한계인 것이다. 
똑 같은 영어라도 미국(AE)은 기술주의 문법을, 영국(BE)은 규범주의 문법을 채택했다. 
그래서 영국의 문법은 Royal English 운운하지만, 시대적 변화를 따라가기에는 벅차서 오히려 역으로 미국 영어로 부터 새로운 것을 수용한다. 

하지만, 한국어는 그러한 탈출구조차도 없이, 그저 출판사에게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출판사에서 가장 돈 안되는 것이 한국어 사전이다. 한국어는 Usage를 가르킬 수 없는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세계 모든 국가들은 현대 한국어의 기준으로 드라마와 한국 영화를 꼽는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한국어 문법의 기준을 들이대면, 빨갱이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