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원균 vs 이순신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 1594년 11월 12일

세에임 2011. 2. 11. 21:40

선조실록 57권 선조 27년, 1594년 11월 12일


김수(金晬)가 선조에게 보고를 하였다. 

“원균(元均)과 이순신(李舜臣)이 서로 다투는 일은 매우 염려가 됩니다. 원균에게 잘못한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일이 점차 악화되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선조가 그 연유를 되물었다. 김수가 보고하기를 


“원균이 10여 세 된 첩자(妾子, 첩의 아들)를 군공(軍功)에 참여시켜 상을 받게 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이것을 불쾌히 여긴다 합니다.”


선조가 되물었다. 


“내 들으니, 고언백(高彦伯)과 김응서(金應瑞)는 좌차(坐次, 자리) 때문에 서로 다툰다 하는데 이들은 무슨 일 때문에 서로 다투는가?”


김응남이 선조에게 답을 했다. 


“대개 공 다툼으로 이와 같이 되었다 합니다. 당초 수군이 승전했을때 원균은 스스로 공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순신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선거이(宣居怡)가 힘써 거사하기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순신의 공이 매우 크지도 않은데 조정에서 이순신을 원균의 웃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원균이 불만을 품고 서로 협조하지 않는다 합니다.”


이어 정곤수(鄭崐壽)는 설명을 덧붙였다. 


“정운(鄭運)이 ‘장수가 만일 가지 않는다면 전라도는 필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부득이 가서 격파하였다 합니다.”


선조가 “이순신이 왜적을 포획한 공은 가장 많을 것이다.”고 반박을 하자 정곤수가 아뢰기를,


“이순신의 부하 중에는 당상관에 오른 자가 많은데, 원균의 부하 중에 우치적(禹致績)이나 이운룡(李雲龍) 같은 자는 그 전공이 매우 많은데도 그에 대한 상은 도리어 다른 사람만도 못하기 때문에 서로 분해 하고 있습니다.”


선조가 정곤수에게 답을 했다. 


“원균의 하는 일을 보니, 가장 가상히 여길 만하다. 내가 저번에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에게 원균에 대해 물었더니 ‘습증에 걸린 몸으로 장기간 바다 위에 있었지만, 일을 싫어하는 생각이 없고 죽기를 각오하였다.’ 하니, 그의 뜻이 가상하다. 부하 중에 만일 공이 많은데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다면 보통 사람의 정리로 보아도 박대한 것 같으니 그는 반드시 불만스런 뜻이 있을 것이다. 당초에 어째서 그렇게 했는가? 과연 공이 많다면 지금 모두 상을 주어서 그의 마음을 위로하라.”


김응남이 답했다. 


“그에게 위로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옳습니다. 이순신이 체직(유임)을 자청하는 것도 역시 부당합니다.”


선조가 되물었다. 


“바깥 여론이 원균을 체직시키려 하는가?”


김수가 아뢰기를,


“별로 체직시키려는 여론이 없습니다.”


이 대화에서 보면, 김수는 중립적인 입장에, 김응남과 정곤수는 이순신과 적대하고, 원균을 감싸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정곤수의 답변에서 정운이 이순신을 협박했다는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이다. 당시 제장들은 모두 출전을 반대하고 있었고, 정운과 송희립만 출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순신의 파직과 석연찮은 칠천량 패전에 대해 김응남과 정곤수의 이름을 기억해 둘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