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 81권, 1596년 10월 21일 선조 29년
이원익이 선조에게 원균에 대해 보고를 했다.
“전투에 임할 때와 평상시와는 같지 않습니다. 원균(元均)과 같은 사람은 성질이 매우 거세어서 상사(上司)와 문이(文移)*하고 절제(節制)하는 사이에 반드시 서로 다투기는 합니다만 전투에 임해서는 제법 기용할 만하다고 합니다.” *(윗 관청과 문서를 주고 받음)
선조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원균(元均)에 대해서는 계미년(1583년)부터 익히 들어왔다. 국사를 위하는 일에 매우 정성스럽고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자 이원익이 다음가 같이 보고를 했다.
“원균이 전공(戰功)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김순명(金順命)도 맞짱구를 치며 답하기를 ...
“충청도(忠淸道)의 인심이 대부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선조가 답을 했다.
“(원균이) 마음은 순박한데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원익이 답을 했다.
“원균에게는 군사를 미리 주어서는 안 되고, 전투에 임해서 군사를 주어 돌격전을 하게 해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군사를 거느리게 하면 반드시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선조가 말을 했다.
“전일에 원균을 탐오하다 하여 대론(臺論)이 있었다. 원균은 지극히 청렴한데 탐오하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김수(金睟)가 원균이 어사로부터 포창을 받았다고 선조에게 알려주었다.
“전에 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있었을 때는 어사(御史) 성낙(成洛)이 장계하여 포장(褒奬)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원익은 반박을 했다.
“원균이 어찌 지극히 청렴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
“소신이 일찍이 종성(鍾城)에서 그를 보니, 비록 만군(萬軍)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횡돌(橫突)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행군(行軍)도 매우 박실(朴實)하였습니다. 탐탁(貪濁)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박실 = 소박하고 실하다, 횡돌 = 가로 질러 돌진하다)
선조가 원균에 대해서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다음과 같은 답을 했다.
“이와 같은 장수는 많이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원익은 끝까지 탐탁치 않음을 내비친다.
“이후로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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