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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을 40km 단체행군으로 혹사시키는 학교가 있다

세에임 2008. 11. 2. 00:57

놀라운 TV특종 "있다 / 없다"의 얘기가 아닙니다.

 

드라마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진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실재하는 이야기 입니다.

 

벌써 20년이 넘었지만, 놀랍게도 그 학교에선 고등학생들을 지금도 매년 40km씩을 행군시켜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예전엔 남북한 합쳐서 삼천리 방방곡곡이란 말을 했었지요. 40km면 100리인데, 보통 성인이 빠른 걸음으로 하루 종일 걸을 수 있는 한계치라고 보시면 됩니다. 

 

군대의 행군 20km~100km

이 40km 행군은 보통 군대에서도 매년 1회 정도씩 합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전방 쪽이나 특수부대는 100km 행군을 하기도 합니다. 후방 쪽에서 보통 20km를 행군 하기도 하지요.

 

확실히 고등학생들에겐 좀 과하긴 하지요. 저도 6살 이후 이불에 쉬한 적이 딱 한번 있는데, 바로 고등학교 1학년때 행군을 마치고 나서입니다.

 

40km 행군을 경험한 군인들은 알겠지만, 행군을 마치고 나면, 발에 물집 잡히는 것은 보통 다반사이고, 물집이 2중으로 터져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양말에 비누칠을 살짝하기도 하고, 물에 소금을 타서 탈진을 막기도 하는 등 행군준비도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등학생이라 총하고 완전군장을 안한다는 것이죠.

 

비록 무장을 안 했다  뿐이지 40km 의 거리는 동일한 경험을 하게 해줍니다. 졸면서 걷다가 논에 빠지기도 하고, 자면서 걷기도 하고 아무튼 행군 때에는 인내의 극한을 실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군대행군에서도 졸면서 행군하다가 탱크 밑에 깔려 떡이 된 사고들이 적지 않았지요?

 

왜 이런 짓을 시킬까?

이 고등학교의 초대교장인 박종한 선생은 은 독립군의 후손이자, 스스로 학생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28세 때 세운 학교가 대아고등학교의 전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족정신이 투철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싸웠던, 이순신 장군을 거의 신 모시듯 하였습니다. 충무공 탄신일에는 모든 수업이 정지되고 전교생을 동원하여 100리 행군을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까라면 까!!!" (박정희 때의 유명한 사건의 한 대사!!)

 

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역사적 배경이 숨어 있었던 거죠.

 

이순신 장군은 조선군의 세가 불리하여, 섯불리 나아가 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어명도 따르지 않는다 하여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왜군들에게 돌격을 명합니다. 결국 조선군은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통렬한 패배를 당하고, 거북선부터 시작하여 거의 모든 전선을 파괴당합니다.

 

감옥에서 고문까지 서슴치 않았던 이순신을 조정은 부랴부랴 석방하고, 뒷수습을 명합니다. 석방은 되었지만, 이순신은 고문의 휴유증으로 병마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매기도 합니다. 결국 현장에 도착해서 이순신은 경상도에서 전라도까지 행군을 하며 패잔병들을 모아 군대를 수습하게 됩니다. 절망에 빠진 이순신에게 남아 있던 것은 단지 12 척의 배뿐이었습니다. 


"신에게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죽기 살기로 싸운다면 ...." 

 

이순신이 이렇게 경상도에서 전라도까지 사경을 헤매면서까지 행군을 한 것을 기리기 위해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은 충무공 탄신일에 전교생을 동원하여 행군을 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가장 힘들었고, 2~3학년 때는 어떻게 했는 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한 번 가본 길은 훨씬 덜 힘들게 느껴지더군요. 덕분에 군대가서도 행군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습니다.

 

가끔 살기가 힘이 들어지면, 그때 일사병에 픽픽 쓰러지던 친구들, 졸면서 걷다가, 자면서 걷다가 하면서 인내의 극한을 생각하게 하던 기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지금은 좋은 기억뿐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