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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을 말한다

세에임 2009. 7. 3. 12:32

정동영의 부각

유망한 정치가 였던 중진급 인사 정동영이 그야말로 중진의 자리를 찾은 것은 김대중이라는 거목 이후 자잘한 나무 밖에 없었던 2002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에 입후보를 하면서 부터이다. 이때 당시 민주당 최고 위원의 자리에 앉아 있던 이인제 후보를 꺽은 노무현 후보와 함께 경선에 참여하면서 부터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극적인 드라마로 기록된 이 경선에서 대립각을 세웠던 노무현 후보에 맞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깨끗하게 승복함으로써 그는 "의리있는 사람", "도리를 지키는 사람"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2004년 노무현 대통령 집권 후 그는 다른 정치인에게 큰 빚이 없었던 유일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가장 큰 혜택과 프리미엄을 누리는 정치가가 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동안, 그를 차기 지도자로 키우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노력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통일부 장관 당시 라이스와 접견하는 정동영 장관(▲이미지 위키백과)


정치 관료 경험이 적었던 그에게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통일부 장관과 국가안전보장회(NSC) 상임위원장 등에 임명하고 또한 대통령이 가야할 국제회의에 대통령 특사 등의 자격으로 수차례 "인맥"과 "국제, 관료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것은 갑작스럽게 폭발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된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아쉬워하던 부분이었다.

 

열린 우리당의 몰락의 시초

2004년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정동영은 열린우리당을 몰락으로 이끌었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구화(口禍)를 일으킨다. 탄핵 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일으킨 이른 바 "노인 비하 파동"이다. 비록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승은 거두었지만, 이 발언으로 이후 있었던 보궐선거와 지방선거 등에 줄줄이 패배함으로써 식물국회와 내부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고, 대통령 선거와 맞물린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경험하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 몰락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대립각 

정동영 개인으로서도 인기가 떨어진 노무현 대통령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그는 우리당의 재앙이 되었다. 경상도 출신의 유시민(대구)과 문재인(부산)을 비교해 보면, 이 두 사람이 끝까지 의리를 지킨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반면, 그는 배신한 얇삭한 정치인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많은 국민들의 입장에서 정동영은 참여정부의 단물은 다 빨아먹었으면서, 위기는 같이 하지 않았던 배덕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모진 비유를 하자면, 박연차 회장과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모진 바람을 맞은 강금원 회장의 차이라고나 할까 ....

 

결국 정동영은 스스로 자리를 찾았다. 그는 민주당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마했던 2009년 제18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전주의 큰 아들로 거듭나는데 성공했지만, 그가 쌓아왔던 모든 것은 무너졌다. 아니 스스로 허물어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는 유망한 중진급 거물에서, 이제는 중진급의 위치도 차지하기 어려운 초라한 인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세한연후(歲寒然後)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통령 후보까지 한 정동영씨는 더 이상 한국 정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끝까지 집을 지킨 이해찬, 유시민, 김두관, 문재인 등의 인사들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바람개비가 될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 특히 김두관과 문재인이 일으킬 바람은 한나라당 외에는 별다른 대안 세력이 없었던 경상도에서 새로운 바람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정동영이 왜 좀 더 바보스럽지 못하고, 교활하게만 살려고 했나 하는 점이다.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일관성을 지켰더라면 .... 겨울 이후에 또 봄이 올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모진 겨울에 소나무의 푸름이 드러난다고 했던가? 그리고 그 푸름을 기억하며, 모진 겨울을 누르고 다시 봄이 올 것을 희망한다.